황제헌원의 책사 '풍후(風后)'
황제헌원의 책사 '풍후(風后)'
황제헌원의 책사라는 '풍후(風后)'란 사람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풍후의 성은 풍씨風氏인데. 풍씨風氏의 시조는 복희씨라고 중국의 기록들에
나오며 풍씨족들은 동이족 구이九夷 가운데 하나인 풍이風夷 였습니다.
풍이風夷는 동이東夷에 속하였습니다.
참고로 풍후風后에 대한 기록을 보면.
《사기 오제본기(史記 五帝本紀)》에는
[풍후(風后), 역목(力牧), 상선(常先), 대홍(大鴻)이 일어나 백성을 다스렸다. ]
라고 말합니다.
풍후風后는 상고시대 때의 재상 중 하나입니다.
배인의 《집해》에서 정현이 말하길 “풍후는 황제의 삼공이다”라고 했습니다.
장수절은 《정의》에서, 《제왕세기》에 이르길
“황제의 꿈에 큰 바람이 불어 천하의 먼지와 때가 모두 사라졌다” 황제가 자면서 탄식하여 말하길 ‘바람을 호령하니 집권자요 먼지와 흙을 제거하였으니 후(后)가 있구나. 천하에 풍씨이며 이름이 후(后)인 사람이 있단 말인가?’ 이리하여 두 개의 점에 의지하여 그를 찾았더니 회우에서 풍후를 얻어 재상에 올랐다.
고 말합니다.
풍후는 황제헌원의 삼공三公이었고 [제왕세기]의 기록의 표현으로 보아
풍후에 대해서 아주 대단한 재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풍후는 병법서兵法書를 남겼다고 기록에 나오는데.
이는 역사기록 상으로 나오는 최초의 병법서입니다.
《예문지》에 이르길, “풍후의 병법은 13편이고, 그림이 2권이며 《고허》20권이다.”라고 했습니다.
풍후風后는 기록상으로는 최초의 재상이며 최초의 책사입니다.
그리고 최초의 병법가兵法家입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정조 때 저술된 '무예도보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풍후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무예도보통지 권수 병기총서] 발췌
[... 어떤 이는 "병(군사를 다루는 일)은 지모(작전, 계략)일 뿐이고, 진(부대의 움직임)은 미말(꼬리 끝과 같이 중요치 아니함)에들어간다 하니 하물며 기기(무기)는 말해 무엇할 것인가? 따라서 운명은 오직 장막 안에 있고,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천리 밖에 있으니 저들이 이리 저리 돌고 뛰고 소리치며 용기를 보이는 것은 한 사람을 대적할 뿐, 어찌 승패를 좌우하는 수가될까 보냐."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칼을 쥐고 있어도 '맹분'과 '하육'같은 용사가 피하는 것처럼 병기를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졸장부가 한번 친 것이 용사가 백번 친 것보다 나을 때가 있는 것은 그 세(자세, 움직이는 방법)를 얻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책은 있으나 진이 없는 것', '진은 있으나 병기가 없는 것', '병기는 있으나 세(사용하는 방법)가 없는 것' 등은 모두 병(군사를 다루는 일)이라 할 수 없다. 양 진이 서로 맞붙어 상대의 칼이 날카로워 나의 칼이 부러지고 적의 갑옷을 뚫지 못하고 나의 화살도 굽어 버리는 절박한 때를 당하면 비록 '현녀'에게 기기를 쥐어주고, '풍후'에게 지조의 날카로운 날개와 맹수의 발톱이 있을지라도 그 지모(작전, 계략)는 아무 쓸모가 없다. 이 도보(무예도보통지)를 만드는 것은 지금에 와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다. 이 책은 이미 역대 왕들이 찬술한 병서를 책머리에 싣고, 금상(정조대왕)께서 몸소 편찬하신 '병학통', '예진총방'같은 병서를 이미 간행 반포하여 외내부에 등본 되어 있는 것만도 수십여 종에 이른다. 신 등이 순서대로 편록한 것은... ]
풍후風后를 '지조의 날카로운 날개와 맹수의 발톱이 있을지라도'라고
묘사함으로써 풍후의 번뜩이는 지략을 말하고있습니다.
풍후風后는 지략이 많은 사람으로 기록되고있는겁니다.
팔진법은 황제(皇帝)의 신하인 풍후(風后)가 창안해낸 여덟 가지,
천(天).지(地).풍(風).운(雲).호익(虎翼).사반(蛇蟠).비룡(飛龍).조상(鳥翔).사(蛇)진법을 의미합니다.
풍후風后가 팔진법을 최초로 창안했기에 당나라에선
팔진법의 조상을 풍후風后의 주군인 황제헌원의 발명품으로
기록하였습니다.(고대 시대 땐 신하의 발명품은 주군의 발명품으로
기록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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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풍후가 저술했다는 병법서 '악기경(握奇經)' 원문인데.
經曰 八陣 四爲正 四爲奇 餘奇爲握奇 或總稱之
先出游軍定兩端 天有衡圓 地有軸方 前後有衝 風附于天 雲附於地 衡有重列各四隊 前後之衝各三隊 風居四維 故以圓 軸單列 各三隊 前後之衝各三隊 雲居四角 故以方 天居兩端 地居中間 總爲八陣
陣訖 游軍從後躡敵 或驚其左 或驚其右 聽音望麾 以出四奇 天地之前衝爲虎翼 風爲蛇蟠 圍繞之義也 虎居於中 張翼以進 蛇居兩端 向敵而蟠以應之 天地之後衝爲飛龍 雲爲鳥翔 突擊之義也 龍居其中 張翼以進 鳥掖兩端 向敵而翔以應之 虛實二壘 皆逐天文氣候 向背山川利害 隨時而行 以正合 以奇勝 天地以下 八重以列 或曰 握機望敵 即引其後 以掎角前列 不動而前列先進以次之 或合而爲一 因離而爲八 各隨師之多少 觸類而長
天或圓而不動 前爲左 後爲右 天地四望之屬是也 天居兩端 其次風 其次雲 左右相向是也 地方布 風雲各在前後衝之前 天居兩端 其次地居中間 兩地爲比是也 雲象龍縱布 天一 天二次之 縱布地四 次於天衡之後 縱布四風 挾天地之左右 天地前衝居其右 後衝居其左 雲居兩端 虛實二壘 即此是也
풍후風后는 천문天文에 능통해 북두칠성을 관찰하다가
나침의 원리를 발견하여
나침을 만들어 손을 뻗쳐 뭔가를 가리키는 듯한 인형의 손가락에 나침을 장착하고
그 인형을 병거에 장착하여 '지남거'라 이름짓고 이를
치우천황과의 탁록대전에 사용하였다고 중국의 상고사는
전합니다.
고금도서집성 예술전(古今圖書集成 藝術典)에서도 논하기를
‘황제의 승상인 풍후(風后)가 모든 태을법(太乙法)을 취하여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었고, '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역사상 최초로 나오는 나침반입니다.
풍후風后는 기록상으로 보이는 최초의 천문학자입니다.
참고로 성경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태양과 달과 별들을
만드신 목적은 그것들로 하여금 '징조'로 삼아 사람들에게 미래를
알게해서 멸망치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하려함입니다.
그래서 천문학이 생겼고 태양과 달과 별의 운행으로 미래를 점치게
된것인데. 이것을 하나님을 위해 쓰지 않고 한낱 길할지 불길할지
이런 것에만 사용함으로 타락해버린것입니다.
아무튼 풍후는 아마 올바른 천문天文에 능해서 치우와 황제헌원과의 전쟁이
끝난 뒤에는 자신의 모든 천문지식을 동원하여 최초로
인간의 미래를 예견하는 수학적법칙들과
자연의 수학적법칙들에 대해 역사에 길이 남을 책을 쓰니
그것이 바로 기문둔갑奇門遁甲입니다.
지금도 역학자들과 철학관의 철학자들에게 풍후의 기문둔갑은
역학과 점술법의 시초이며 최초의 역학.점법 교과서입니다.
기문둔갑은 고대 시대로부터 전쟁에도 쓰여 병법兵法의 주요한 요소로서
사용되었습니다.
기문둔갑은 현대인류의 실생활 에도 필요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의 사생활에
기문둔갑의 원리들이 내포되어있다는 것이 기문둔갑 학자들의 지적입니다.
기문둔갑은 병법兵法에도 필요하기에 병법연구가들은 기문둔갑을
터득하려 했으나 너무나 심오하여 그것을 터득하기 어려워 했지만
제갈공명은 불과 자신의 나이 20대 초반 이전에 이미 그것을 다 알고
터득하였기에 삼국지 연구가들도 감탄하는 것입니다.
(삼고초려 당시 제갈량 나이 20대 초반)
그리고 중국 의 당唐 황제皇帝 이세민의 병법가인
이정은 '이위공병법(이위공문대)'를 쓴 사람입니다.
이정(李靖)이 기문둔갑을 병법과 정치에 활용하여
당나라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면서 후일. 이것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금서(禁書)로 정해졌습니다.
제왕들은 천하를 평정하고 난 이후 기문을 익힌 술사들이 가장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어 최우선적으로 제거되어왔으며
또한 실전에 사용된 이론이나 문헌을 모두 소각하였고 기문에 관한 서적을 깊숙이 감춰 두고 제왕들만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기에 제왕학(帝王學)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어쩌다 시중에 유출된 서적이 간혹 있더라도 주요 이치를 고의로 누락시킨 상태의 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천문을 봄으로 인간의 길을 살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하는 도구가
오히려 전쟁에 이용되었습니다.
[삼국사기] 김유신조(金庾信條)에 따르면
김유신의 손자 윤중의 서손 암(巖). 즉 김유신의 현손玄孫이
당唐에 유학가서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터득해
이를 응용한 육진병법(六陣兵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윤중(김유신의 손자)의 서손 암巖은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방술(方術) 익히기를 좋아하였다.
젊어서 이찬이 되어 당唐으로 들어가 숙위로 있으면서
틈을 타서 스승에게 음양가(陰陽家)의 법을 배웠는데
하나를 들으면 세 가지를 미루어 알았으므로, 서서 둔갑할 수 있는 법을
저술하여 스승에게 바쳤더니 스승은 실심하여 말하기를,
"너의 명달明達이 이에 이를 것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며 그 후부터는 감히 제자로 대하지 않았다.
(당) 대력(大歷) 연간에 환국하여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고
양(良).강(康).한(漢) 3주의 태수를 역임하였으며,
다시 집사시랑 . 패강진 두 상이 되었다.
이르는 곳마다 마음을 다하여 보살피고 3계절 공무의 여가에
육진(六陳) 병법兵法을 가르치니 사람들이 모두 편리하게 생각하였다."
삼국사기(원문)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339~340p
신라가 신라만의 육화진법六花陳法 을 만들어 당나라의 20만 기병대를 괴멸시켰다고하죠.
(KBS 역사스폐셜 [신라는 당군을 어떻게 이겼나? 매소성 전투의 비밀] 편)
<U><U><U><U><U>http://classnet.hongik.ac.kr/%7Ehome/hbbs/download.php?table_id=136&msg_id=4</U></U></U></U></U>
참고
한국사연구회 제227차 월례발표회 발표문(2002.3.16)
羅唐戰爭期 唐兵法의 導入과 그 意義
동국대 교수 서영교님의 발표문입니다.
주요 구절을 조금 인용하자면.
[설수진의 육진병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660년에서 668년까지 공동작전을 수행했던 것이 확실한데, 그 과정에 당의 군사기술을 습득하여 만든 것임이 분명하다. 사실 674년 9월 문무왕이 직접 목격한 육진병법은 나당전쟁 기간해 도입한 것이다. 10년간의 군사동맹과 4년간의 당군을 상대로 한 전쟁 수행은 신라가 당의 군사기술을 배우는 수업기간이었다.(.....)
이에 필자는 이정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설수진의 육진병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660년에서 668년까지 공동작전을 수행했던 것이 확실한데,
그 과정에 당의 군사기술을 습득하여 만든 것임이 분명하다. 사실 674년 9월 문무왕이 직접 목격한 육진병법은 나당전쟁 기간에 도입한 것이다.
10년간의 군사동맹과 4년간의 당군을 상대로 한 전쟁 수행은 신라가 당의 군사기술을 배우는 수업기간이었다. (.....)
이에 필자는 이정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口이위공문대口 및 그의 六花陳法(육화진법)의 원형이
된 제갈량의 八陳兵法(팔진병법)의 내용을 담고 있는 口諸葛亮集(제갈량집)口을 검토하여,
674년 문무왕이 목격했던 육진병법의 모습을 가능한 한 복원하고자 한다. (.....)
권덕영의 지적대로 병법가 설수진이 口天地瑞祥志(천지서상지)口라는 천문지리서를 편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설수진은 최소한 諸葛亮(제갈량)의 저술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갈양 또한 천문지리에 능통했다. 이러한 예는 口三國史記삼국사기口 券권43, 金庾信傳(김유신전)에서 볼 수 있다. 김유신의 玄孫(현손)인 김암은 당에서
陰陽家法(음양가법)을 배워 大歷年間대력연간(766-779)에 귀국한 후 천문을 맡은 司天大博士
(사천대박사)가 되었고
양주,강주,한주 등 3개 州(주)의 태수를 역임한 후 집사부 시랑을 거쳐 패강진 두상에 이르렀다.
그는 농한기에 부임지의 백성들에게 六陳兵法(육진병법)을 가르쳤다 한다.
口李衛公問對(이위공문대)口 下券(하권)의 말미에도 "天(하늘)은 陰(음)과 陽(양)을 말하며,
地(땅)는 地勢(지세)의 험함과 평탄함을 말한다.
즉 用兵(용병)에 능한 자는 음으로 양을 빼앗고 險(어려울 험:어려움)으로 易(쉬울,편할 이:쉬움)를 치는 것"이라 한다. 天文地理(천문지리)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병법을 實戰(실전)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이 발표문의 주제는
병법가 설수진이 신라만의 독창적인 육화진법을 만들어 나당전쟁을
대비할 때
제갈량의 병법 '편의십육책'을 참고하여 제갈량의 팔진법을 배우고
제갈량의 팔진법을 배워 육화진법을 창안한 당나라 '이정'의
병법서 '이위공병법서(이위공문대)'를 참고했다는 사실입니다.
제갈량의 팔진八陳은 기문둔갑에 의거한 것으로서 제갈량의
천문지리적 이해가 들어있기에 신라는 이 천문지리에 대한 이해를
해야 육화 진법을 실전에 적용할수 있기에 제갈양의 천문지리를
참고했다는 것이 저 연구자료의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 알아두어야 할것.
제갈량,당나라 이정 은 모두 기문둔갑에 능통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며
이정 이 창안한 육화진법 역시 제갈량의 팔진병법에 근원한 것으로서
아마 이를 통해 추정하건데. 이정의 기문둔갑 지식도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지은 육임유원(六壬類苑)이라는 책에서
기원하지않은가 싶습니다.
그리고 김유신의 현손玄孫 김암에 대해서는 네이버의
백과사전 '기문둔갑'편도 언급합니다.
[기문둔갑의 시작은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 따르면 헌원황제(軒轅皇帝)가 치우천왕(蚩尤天王)과의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우연히 꿈에 천신(天神)에게서 부결(符訣)을 받았고, 이를 풍후(風后)가 명을 받아 문자로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삼국시대에 와서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더욱 발전시켜 병법에 이용하여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 당(唐)나라 태종 때 이정(李靖)이 기문둔갑을 병법과 정치에 활용하여 당나라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면서 이것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금서(禁書)로 정해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조(金庾信條)에 따르면 김유신의 고손(高孫)인 암(巖)이 당나라에 유학가서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터득한 뒤 이를 응용한 육진법(六陣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
네이버 백과사전 '기문둔갑'편 중
그러나 이토록 대단한 풍후風后는 중국 사료들 속에
조금조금 언급될 뿐 그 기록들은 곳곳에 흩어져 기록되어있고
모아져 기록되어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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