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소호금천과 전욱

 신라와 소호금천과 전욱



(내가 ai로 그린 그림)


김유신은 신라의 미소년 화랑이며 전쟁을 잘하는 명장인데.

그가 하늘을 숭배하는 신전의 여사제 ‘천관녀’와 연애한 얘기는 

일본의 미나모토 요시츠네와 시즈카 고젠을 연상케한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을 보면

신라 김씨 시조가 소호김천씨 라고 나온다.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들 그렇게 말했다고한다.


김유신의 비석에도 김유신은 황제헌원의 자손이고 소호의 후손이라고 나온다.

소호는 황제헌원의 아들이다.

헌원은 바로 그 악마 ‘치우’의 사지를 찢어 죽인 사람이다.


고대 중국 기록을 보면

소호김천씨 그러니까 소호금천씨는 서방의 신이며 동시에 ‘금속’의 신이다.

소호김천씨가 관장하는 색깔은 흰 색이다.


이는 백인종이 있는 고대 근동과 중앙아시아에서 청동기,철기가 시작되어 중국으로 전래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할 수 있게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또 다른 중국 기록을 보면 

소호의 나라가 중국의 동쪽 머나먼 바다의 바닥이 없는 골짜기 혹은 구렁텅이 속에 있다고 한다.


헌원의 손자 ‘전욱’은 역시 신(神)의 족에 속한다. 

전욱의 아버지의 이름은 한류(韓流)인데. 왠지 이름이 삼한(三韓)과 어떤 관련이 

있는게 아닐지 추측케 한다.

전욱은 소호의 조카이다.


소호는 전욱에게 장난감을 줬는데. 그 중엔 비파도 있었다.

 전욱이 비파 타며 놀다가 실수로 미끄러졌는지 

비파가 그 속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소호는 중국 산동반도에도 나라를 두었다고한다.

즉 소호의 나라는 동이족(東夷族)의 나라이다.

중국 산동반도의 노나라의 신하 담자가 노나라의 군주와 대화를 했는데.

대화 중에 중국 산동반도에 있었다는 소호국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먼 옛날 헌원은 구름을 관직의 이름으로 삼아 관직하는 사람을 ‘운사(雲師)’라 

불렀는데. (이 부분은 홍산문화의 구름괴물 모양 옥기와 고조선 신화의 운사(雲師)와의 관련성을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소호국은 독수리,부엉이,올빼미,비둘기 등을 관직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들은 공자가 “호오~” 하며 바로 담자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담자에게서 중국 상고시대 역사와 관직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선 제자와 다시 만난 공자는 “중국에서 관직 제도가 사라져도 사방의 야만족들에게

중국의 관직 제도가 남아있어서 다시 가져오면 된다.”라는 말을 내가 옛날부터 들어왔는데.

담자를 만나고 오니, 과연 그러함을 알게 되었다. 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중국 산동반도의 동이족이 새를 숭배하는 토템 부족 사회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 알지도 알에서 태어났고,

혁거세의 부인 알영도 치킨드래곤의 허리에서 태어나서 새 부리가 달려있었다.

샤워를 하니까 그 새 부리가 뚝 하고 떨어져나갔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은 대부분 고조선이나 마한하고는 관련이 없고 

중국 진나라 만리장성 쌓다가 헉헉 노무 힘들다이기야 하며 고조선의 낙랑 땅으로 도망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기서도 만족 못하고 헉헉하며 경상북도 경주로 도망쳤다.

그들은 진나라,연나라,조나라,제나라 사람들인데.

진나라 역시 시조가 새의 알에서 태어났으며,

연나라는 홍산문화,하가점하층문화 이런 고조선 계열 문명이 있던 땅 근처에 있고

제나라는 산동반도 사람들이라서 

어찌 보면 신라 사람들이 자기들이 소호금천씨의 후예다 라고 말한건 그들은 

고조선 단군 그런건 관심도 없고 중국 대륙 출신이라는걸 자랑스러워 한듯 하다.

여하튼 신라 시조의 새의 알 탄생 신화는 중국의 동이족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듯 하다. 


신라가 새를 숭배했다면 마한은 말을 숭배한거같다.

고대 중국 기록 ‘삼국지 동이전 마한편’을 보면 마한 사람들은 소,말을 부리지 않고

족장이 죽으면 소,말을 죽여서 순장시켰다고 한다.

이로 보아 소,말을 논밭을 가는데 쓴다거나 타고 다니는데 쓰기 보다는

신성시 하는 문화가 있었던게 아닐까.

그러면 마한의 시조 탄생 신화라는 것도 있을법한데

이는 마한을 멸망시킨 백제의 짓인진 몰라도 마한 시조 탄생 신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려서 너무 아깝다. 


기원전 2500년경 고대 중국 산동반도의 룽산문화(龍山文化 = 용산문화) 사람들은

옥(玉)을 숭배했다.

옥으로 사나운 이빨을 가진 괴물인간의 얼굴을 만들었는데.

이는 중국 산동반도에 구려(九黎)란 나라를 세웠다는 괴물인간 치우를 

연상케한다.


룽산문화 사람들의 조상들은  룽산문화 이전의 산동반도 문화 ‘다원커우(대문구)’이다.

다원커우는 기원전 3000년의 고대 신석기 문화이다.


다원커우 사람들은 술을 마시기를 좋아해서 술과 관련된 용기들이 많이 출토된다.

다원커우 사람들은 새 주둥이에, 3개의 발이 달린 뚱뚱한 토기에 술을 담아 마셨다.

이는 동이족의 음주가무 속성 , 동이족 신화의 3개의 발이 달린 삼족오를 연상케하는 것이다.


룽산문화 사람들은 굽이 높은 검은 색 술잔이나 굽이 높은 검은 색 기대에 검은 색 술잔을 놓고 마셨다.

이는 산동반도의 동이족이 바닥에 앉는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편

“논하여 말한다. 신라 고사(古事)에 이르기를, “하늘이 금궤를 내렸으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註 001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괴상해서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신(臣)이 역사서를 편찬하려고 보니 그 전승이 오래되어 그 말을 빼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또 들으니,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註 002의 후예이므로註 003 성을 김씨라고 했으며 신라의 국자박사(國子博士)註 004 설인선(薛因宣)註 005이 지은 김유신의 비註 006와 박거물(朴居勿)註 007이 짓고 요극일(姚克一)註 008이 쓴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註 009에 보인다., 고구려 또한 고신씨(高辛氏)註 010의 후예이기에 성이 고씨(高氏)이다.”라고 하였다. 『진서(晉書)』註 011 재기(載記)에 보인다.註 012 옛 기록[古史]에 이르기를,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註 013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진(秦)나라註 014·한(漢)나라註 015의 난리 때 중국 사람이 많이 해동(海東)으로 도망하였다.”라고 하였으니註 016 곧 세 나라의 조상이 어찌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그 나라를 향유함이 길었으나, 백제의 마지막에 이르러 행하는 일은 도리에 어긋난 일이 많고, 또 대대로 신라와 원수가 되어 고구려와 연합하고 화목함으로써 침략하며, 이익과 편의에 따라 신라의 중요한 성(城)과 큰 진(鎭)을 나누어 차지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으니 이른바 어진 사람과 친하고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 나라의 보배註 017라는 말과 달랐다. 이에 당나라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서 그 원한을 풀라고 하였는데, 겉으로 따르는 척하면서 속으로 어겨 큰 나라에 죄를 지었으니, 그 멸망은 또한 마땅하다.”

論曰. 新羅古事云, “天降金樻, 故姓金氏.” 其言可恠校勘 032而不可信, 臣修史以其傳之舊, 不得刪落其辭. 然而又聞, 新羅人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見新羅國子愽士薛因宣撰金庾信碑及朴居勿撰婔克一書三郎寺碑文.. 髙句麗亦以髙辛氏之後, 姓髙氏 見晉書載記.. 古史曰, “百濟與髙句麗, 同出扶餘.” 又云, “秦·漢亂離之時, 中國人多竄海東.” 則三國祖先, 豈其古聖人之苗裔耶. 何其享國之長也. 至於百濟之季, 所行多非道, 又丗仇新羅, 與髙句麗連和, 以侵軼之, 因利乗便割, 取新羅重城·巨鎮不已, 非所謂親仁善鄰國之寶也. 於是, 唐天子再下詔平其怨, 陽從而隂違之, 以獲罪於大國, 其亡也, 亦冝矣.


校勘 032 怪의 속자이다.



// 삼국사기 김유신전

김유신(金庾信)註 001은 왕경(王京)註 002 사람이다.註 003 〔그의〕 12세조(世祖)註 004는 수로(首露)註 005인데,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註 006 〔수로는〕 후한(後漢)註 007 건무(建武)註 008 18년 임인(壬寅; A.D. 42년)에 구봉(龜峯)註 009에 올라가 가락(駕洛)註 010의 9촌(村)을註 011 바라보고,註 012 마침내 그곳에 나아가 나라를 새로 세우고註 013 이름을 가야(加耶)註 014라 하였다가 후에 금관국(金官國)註 015으로 고쳤다.註 016 그의 자손이 서로 〔왕위를〕 계승하여 9세손(世孫) 구해(仇亥)註 017에 이르렀는데, 〔구해는〕 혹은 구차휴(仇次休)註 018라고도 하며, 유신에게 증조부(曾祖父)가 된다.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이르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註 019의 후예여서 성(姓)을 김(金)이라 한다.”라고 하였다.註 020 유신비(庾信碑)註 021에서도 또한 “헌원(軒轅)註 022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자손이다.”라 하였으니, 곧 남가야(南加耶)註 023 시조(始祖)인 수로와 신라〔왕〕는 같은 성이었다.註 024

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校勘 003武十八年壬寅, 登龜峰, 望駕洛九村, 遂至其地開國, 號曰加耶, 後攺爲金官國.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亥校勘 004, 或云仇次休, 於庾信爲曽祖.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校勘 003 정덕본은 建이 결획(缺劃) 오각(誤刻)되어 있다.

校勘 004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仇衝王으로 되어 있으며, 이병도는 亥를 充의 오각(誤刻)으로 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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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세기 후반에 박거물(朴居勿)이 찬하고 요극일(姚克一)이 쓴 「삼랑사비(三郞寺碑)」가 건립되었다. 여기에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金氏)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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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 원년(681)에 건립되었다고 추정되는 「경주(慶州)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에 문무왕의 15대조(代祖) 성한왕(星漢王)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하고, 효소왕 4년(695) 무렵에 건립된 「김인문(金仁問) 묘비(墓碑)」에 “태조(太祖) 한왕(漢王)은 천년의 □을 열고”라는 기록이 전한다. 여기서 한왕은 성한왕을 가리킨다. 한편 「경주(慶州) 흥덕왕릉(興德王陵) 비편(碑片)」에도 태조 성한(星漢)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고려 초에 건립된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碑)」에서는 성한(聖漢)으로 표기하였다. 중대 왕실에서 성한(星漢 또는 聖漢)을 태조로 인식하였으므로, 태조대왕은 성한을 가리킨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종래에 성한의 실체에 대해 알지(閼智)로 보는 견해(今西龍, 1933; 1970, 504쪽; 황선영, 1989; 강진원, 2020, 168~169쪽), 본서 권제2 신라본기제2 미추이사금 즉위년조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김알지 탈해왕대조에 알지의 아들로 나오는 세한(勢漢) 또는 열한(熱漢)으로 이해하는 견해(末松保和, 1954; 강종훈, 1994; 채미하, 2002), 미추이사금으로 이해하는 견해(변태섭, 1964; 김창호, 1983; 정연식, 2011), 관념상의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이문기, 1999) 등이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今西龍, 1933, 『新羅史硏究』, 近澤書店; 1970, 『新羅史硏究』, 國書刊行會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변태섭, 1964, 「묘제의 변천을 통하여 본 신라사회의 발전과정」, 『역사교육』 8

김창호, 1983, 「신라 태조성한의 재검토」, 『역사교육논집』 5

황선영, 1989, 「신라의 묘제와 묘호」, 『동의사학』 5, 동의대학교 사학회

강종훈, 1994, 「신궁의 설치를 통해 본 마립간시기의 신라」, 『한국고대사논총 6』,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이문기, 1999, 「신라 김씨 왕실의 소호금천씨 출자관념의 표방과 변화」, 『역사교육논집』23·24

채미하, 2002, 「신라 종묘제의 수용과 그 의미」, 『역사학보』 176

정연식, 2011, 「신라의 태조 미추왕과 은하수」, 『한국고대사연구』 62

강진원, 2020, 「신라 중대 종묘제 운영과 오묘 시정」, 『역사학보』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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